1978년 백화양조 술통에서 발견된 여고생

국내사건

1978년 백화양조 술통에서 발견된 여고생

심냥 2021. 11. 29.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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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건은 1978년에 4월 8일 발생한 여고생 살인 사건 입니다.

 

 

지금도 백화수복이라는 이름으로 잘 팔리고 있는 청주를 원래 만들던 곳은 백화양조라는 

오래된 주류회사 였습니다. 

백화양조는 1945년 11월에 창설되어 청주생산을 주생산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1964년 6월에 소주공장을 신설하였고, 1972년 8월에는 백화 인삼주의 수출과 판매를

하였습니다. 

백화수복이 백화양조에서 만들어져 잘 팔리고 있던 시절인 1978년 4월 8일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하면서 주가는 하락하게 됩니다.

백화양조 공장의 술통에서 여고생의 사체가 발견된 것입니다.

 

그당시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여서 '여고생의 사체가 담긴 술통에서 술이 판매되고 있었더라'

라는 얘기가 돌았는데 사실인지 괴담인지 정확히 밝혀진 바 없으나 술통에 사람이 들었는데

모를리가 없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아마 괴담일 가능성이 높은것 같습니다.

 

사건의 피해자는 당시 18세의 고3 학생인 김애정 양이 이였습니다.

당시 그녀는 군산지역에서 굉장한 미모의 여학생으로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그녀는 초등학교 동급생 이였던 백화양조 계열사 사장의 아들 강모군과 사귀고 있었습니다.

 

인기가 많았던 그녀는 많은 남자들의 구애를 받았는데 이 사실이 강모군 귀에 들어가자

이에 격분한 그는 김양을 불러 추궁합니다.

 

강모군은 4월 8일 김양 집앞에서 만나서 백화양조앞을 지나다 회사 경비원이 없는 틈을 타서

회사내 실험실로 데리고 들어갔고 김양의 복잡한 남자관계를 추궁하자

김양은 억울하다며 옷을 벗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다가 자신의 감정에 못이겨

실신하며 기절했습니다. 이에 당황한 강모군은 그녀가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자

죽은 줄만 알아서 술통에 넣어 김양은 결국 숨지게 됩니다.

 

 

당시 기사1 (출처 경향신문)

 

당시기사2 (출처 경향신문)

 

4월 26일 강모군은 경찰에 살인 및 사체 유기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처음 거짓말 탐지기를 도입해서

강모군이 거짓반응을 밝혀 냈다고 합니다. 본격적으로 거짓말 탐지기가 활용된 것은 이 사건 2년후

발생된 이윤상 유괴살인사건 부터 였습니다.

 

아무튼 1978년 8월 26일 강군에게 단기 5년, 장기 10년의

징역을 구형을 내렸습니다. 10월 14일 선거 공판에서는 살인죄와 주거침입죄가 적용되어서 단기 2년6개월, 

장기 3년의 징역형이 내려졌습니다. 

 

그뒤 강모군은 1981년 출소했으며 그 뒤의 근황은 아는 이들이 없습니다.

 

건강하게 잘 살아 있다면 현재 60초반 일 텐데 아무래도 돈이있는 집안 이다 보니 신분을 숨기고

잘 지내고 있다보니 그 이후의 근황을 모를수 밖에 없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이후 백화양조는 당시에는 소주의 프랜차이즈 제도가 엄격해서 주로 군산지역 사람들만 이 소주를 많이 먹었다고 합니다.  소주 부문에서는 이 사건으로 큰 타격을 받았지만 양주 사업 부문에서는 주가가 올라갔다고 합니다. 

이후 1982년에 회사명 또한 베리나인으로 독립하였고 이후 두산그룹이 인수했다고 합니다.

해당 사건이 일어났던 백화양조 공장은 사건 이후에는 롯데주류 BG의 공장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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